서울대 수학과 교수님이 쓰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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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우리 아이에게 수학책을 가지고 수학 공부를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우리 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바로 전 해부터였다. (아마 8월쯤 됐을 것이다.) 이제 훌륭한 아빠가 특별히 정성을 들여 사랑하는 아들에게 그림도 많고 문장제도 많은 수학책을 골라 주었으니 이제 그 녀석에게 주어진 과제는 별로 어려울 게 없다. 그저 열심히 공부하는 것만 남았다. 흐흐흐.... 그리고 초등학교 1학년 책의 내용을 대충 눈으로 훑어 본 결과 적어도 처음 한두 달 동안은 매우 편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 처음에는 1, 2, 3, 4, .... 이런 것들이 나오는데 우리 아이야 이미 100까지는 셀 수 있는 녀석이 아닌가. 지금은 (아직도 너무 늦게 자기는 하지만) '외계인의 습성'도 버렸으니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1000까지 가르쳐 줄 수도 있다. 또 덧셈, 뺄셈이야 이미 손가락 발가락으로 매우 고차원적인 것들(합이 40 이하인 것들)까지 공부했으므로 처음 한두 달치 내용은 거저 먹고 넘어갈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낙관과는 달리 초반부터 복병이 나타났다. 그 복병의 정체는 다음과 같이 아주 쉬운 것이었다.
"48 하나 앞의 수는 무엇인가?"
사랑하는 우리 아들 강윤구가 엄숙하게 써 넣은 답은 '49'였다. 책에 붙어있는 해답에 나온 정답은 '47'이었지만 이 정도의 착각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럴 때는 "이런 것도 모르냐? 이 밥통아! 47이잖아!"하면서 길길이 뛰면 안 된다.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면서 침착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다시 한 번 풀어 보라고 하면 된다. 그럼 아이는 금방 스스로 답을 찾아내게 마련이다. 이렇게 아이로 하여금 스스로 답을 찾아가도록 하는 것이 진짜 참 교육이다.
아아,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이 녀석은 "답을 지우고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고 말하는 나를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더니 '49'라고 써 있던 숫자를 빡빡 지우고는 그 자리에 또 다시 '49'라고 힘있게 써 넣는 것이 아닌가. 아니, 이 녀석은 도대체 눈치도 없나? 물어보는 폼만 봐도 모르나? 나는 내 심장의 박동 속도가 조금씩 빨라지는 걸 느꼈다. 이럴 때 끓어오르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어야 아이를 가르칠 자격이 생긴다. 나는 다시 한 번 냉정하고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윤구야, 그럼 48 하나 뒤의 수는 무어지?"
이렇게 물으면 정상적인 지능을 가진 아이들은 "아차!"하면서 48 하나 뒤의 수는 49니까 48 하나 앞의 수는 47이라는 결론을 이끌어 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이 녀석은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그건 47이요."라고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마구 벌렁거리는 마음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다시 한 번 물었다.
"윤구야, 잘 생각해 봐. 48 하나 앞의 수가 뭔지, 그리고 48 하나 뒤의 수가 뭔지. 알았지?"
나는 다시 한 번 다짐했다. "이렇게 아이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해서 답을 찾아가도록 하는 게 '진짜 참 교육'이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하는 것이었다.
"48 하나 앞의 수는 49, 48 하나 뒤의 수는 47인데요."
드디어 최악의 사태가 닥쳐 온 것이다. 나는 참교육이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우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야, 임마! (제 자식에게 이런 험한 말을 쓰는 부모는 부모의 자격이 없다.) 48 하나 앞의 수도 몰라? 아니, 48 하나 뒤의 수가 어째서 47이냐? 바로 49지. 그러니까 48 하나 앞의 수는 47 아니냐? 이제 이해하겠어?"
이렇게 '강력한 권고'를 하게 되면 대부분의 경우 잘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알았다."고 대답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렇게 "에이, 그냥 외우면 되지, 뭘." 하고 넘어가는 게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녀석은 "이해가 안 되요~~~" 하더니 그저 울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녀석이 쓸데없이 고집을 부리는 것에 더욱 화가 난 나는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봤다. (이때 지나간 '아무나'는 녀석의 사촌 동생 민구였다.)
"야, 48 하나 앞의 수가 뭐냐?"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 챈 민구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정답을 말했다.
"47이요."
어떻게든 사태 악화를 막아 보려던 민구의 노력은 사실은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한 것이었다.
"이 밥통아, 이렇게 어린 녀석도 아는 걸 넌 왜 몰라? 그러고도 네가 밥 먹을 자격이 있는 것 같으냐?"
(이렇게 자기 자식에게 저주를 퍼붓는 인간을 누가 선생이라 할 것인가. 우리 앞으로는 정말 이렇게 살지 말자.)
이때 엉엉 울기만 하던 녀석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항변을 했다.
"비디오에서 패스트 포워드(fast forward)를 하면 앞으로 가잖아요!"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비디오에서 패스트 포워드를 하면 앞으로 간다. 그게 어쨌다는 말이냐? 나는 더욱 흥분하고 싶었지만 이미 한계에 다다랐기 때문에 더 흥분하지도 못하고 그게 어쨌다는 얘기냐고 녀석을 윽박질렀다. 녀석의 울음 섞인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 카운터의 숫자도 앞으로 가잖아요."
나는 솔직히 할 말이 없었다. 48에서 하나 앞으로 가면 (패스트 포워드, fast forward) 49, 48에서 하나 뒤로 가면 (리와인드, rewind) 47. 비디오 카운터를 보라. 증거가 있지 않은가. 이게 녀석의 논리였다. 그리고 거기에는 티끌 만큼의 오류도 없었다.
사실 우리가 비디오를 볼 때 "앞으로 돌려!"(또는 "뒤로 돌려!") 하고 얘기를 하면 그게 무슨 뜻인지 항상 헷갈린다. 이건 서로 간의 약속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수직선(數直線) 위에 실수(實數)를 표시할 때 오른쪽으로 가면 크기가 커지고 왼쪽으로 가면 크기가 작아진다고 하는 것도 그저 하나의 약속일 뿐이다. 따라서 이렇게 볼 수도 있고 저렇게 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수학적 논리를 전개할 때에 기본적인 몇 개의 규칙에 대해 약속을 하고 그때그때 필요한 용어를 정의하는 것이다. 또한 이런 기본적인 규칙에 대한 약속을 조금 다르게 하면 또 다른 멋있는 수학이 나오기도 한다. (유클리드 기하학과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좋은 예다.) 그런데 나는 명색이 수학자면서 어째서 이렇게 간단한 이치도 모르고 무조건 아이만 윽박지른 걸까? 책에 나온 해답에 나도 모르게 세뇌되어, 그리고 해답과 다르게 대답하는 아이의 장래가 왠지 불안해서 그렇게 격렬하게 반응했던 건 아닐까? 이유야 어쨌든 변명의 여지가 없는 순간이었다.
몇 년이 흐른 후 둘째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이 되었다. 어느 날 수학 시험(=퀴즈)을 치렀는데 바로 위와 똑같은 문제가 나왔다. 우리 아이들의 유전자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둘째 아이도 '24 하나 앞의 수'를 '25'라고 써 냈지만 선생님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면서 정답으로 해 주었다고 한다. 그 그릇의 넉넉함에 감사할 뿐이다.
[출처] 어느 수학자의 자식교육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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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 아이는??
소윤이에게 물어봤더니 같은 답을 하더군요.
48 앞의 수는 49,
49 뒤의 수는 48,
숫자 세는 방향 손가락을 이동시키면서,
"여기가 앞이고, 여기가 뒤에요"라고
명확히 가리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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